2008년 5월 19일 월요일 새벽말씀
또 말씀을 전해주겠습니다. 금주의 말씀은 “하나님을 알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지 모르고 믿으면 하나님도 속상하시고, 모르고 믿으면 우리도
막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라.”는 이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본인들이 겪고 본인들이 아는 그 상식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역사 해 오신 성경을 보면 그래도 많이 압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시대에 대해서, 그리고 그 환경에 대해서 역사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하면서 알아야 됩니다. 악인에게 대한 하나님, 선인에게 대한 하나님, 중심자에게 대한
하나님이 다 다릅니다. 각각 자기의 사명대로 대한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결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나 악인들이나 어려움은 다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누구든지 어려움은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지켜주셨습니다. 자기 백성이고 자기 것이니까 하나님이 그때그때 어려움을
지켜주시고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서로 의논해서 그것을
해결하며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벗어났을 때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끼리
아무리 의논해도 막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말하기를 “내가 외롭고 쓸쓸하게 있어도 하나님이 옆에 계시구나.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내가 집에서 쫓겨서 어디로 간다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집에서 악인인 형의 손에 쫓겨서 멀리
도망갔을 때에 ‘무슨 죗값인가? 내가 형 대신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의 죗값인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겪어보니까, 하나님을 겪어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야곱이
축복을 받았으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가게 되었는데, 악인인 형은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역사 하신 것을 보고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하고는 거기서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의인들이 늘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의인들에게도 고통과 아픔과 어려움에
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의의 세계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악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그 때 의인들이 심히 낙심도 하고, 낙담도 하고 그럽니다. 항상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시대가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죽 오면서 요셉이 또 그런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열심히
구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 앞에 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셔서 이런 일을 하게
하셨다.”고 시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셔서 꿈을 풀게 바로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지혜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나님을 말해주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이
늘 자기와 함께 했다는 것을 항상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는
“형제들이 그렇게 나를 모 박히게 대했으므로 내가 이와 같이 이곳으로 오게 되어서
총리대신까지 하게 되었다.”고 요셉이 그렇게 풀었습니다. “형제들이 나에게 그렇게 대했지만
그로 인해서 내가 더 잘 되었다. 그런 환난을 받고, 어려움을 받음으로 이렇게 되었다.
만약 애굽으로 팔지 않았으면 어떻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까? 결국은 이렇게 잘 되었으니
미안하게 생각할 것 없이 서로 풀고 잘 지내자.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셔서 된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죽 오면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잘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은 결국은 잘 되게 하셨다는 것을 시인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을
늘 섬기며 말씀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들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모세는 어떠하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보는 철학, 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복이고, 안 들으면 저주다.”했습니다. 백성들을 늘 봤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관한 것도 늘 봤습니다. 그렇지만 그 신앙관은 하나님으로 꽉 찼습니다. “이랬든지
저랬든지 사람이 하나님 말을 잘 들어야 되지, 듣지 않으면 화이고 들으면 복이다.”그러면서
모세가 하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진 관과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도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어서, 백성들에게 전해주라는
말씀을 많이 들어서 그런 관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 관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너무
말을 안 듣고 하는구나.’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일반 선지자들과 다르니까 기도 생활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구원주라.’하며 구약에 그들을 구원하라고 세운 큰 대표적인
인물로 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에 크게 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신약 시대의 말씀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면서 다윗이나 다니엘,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 관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내가 낳은 백성입니까? 받는 고통이 너무
큽니다.”하고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나중에는 “나 하나 같으면 괜찮은데 이 백성들로 인하여
받는 고통이 너무 큽니다.”라는 이야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면
모든 사람에게 일이 일어나면 자기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 한 사람에게 일이
안 일어나면 괜찮은데, 백성들에게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다 지도자에게 갑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터졌다. 이런 걱정이 있다. 누가 고통받고 있다. 누가 사고 났다.’하는
이런 것들을 지도자가 전부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말을 안 들으면 또 모세에게
그 고통이 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몸서리치면서 인생을 살은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그렇게 죽 오다가 다윗이 왔습니다. 다윗도 사울로 인해서 7년 동안 모진
고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만일 왕을 안 했으면, 사울 밑에서 백성 가운데 살며 그냥
시골에서 살았으면 전혀 그런 고통을 안 받았을 것입니다. 항상 보면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면 그런 모진 고통이 옵니다. ‘왜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런 모진 고통이 오나?’하지만 우리가
큰집을 지으려면 고통이 오지 않습니까? 집을 지으려니까 하나님을 믿으나 안 믿으나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집을 하나 지어도 너무 너무 고통이 오더라구요. 나도 ‘괜히 집을
시작했다. 그냥 옛날에 살던 집에서 살 걸.’하는 그 정도까지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주 뼈저린 고통을 받으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데 왜 이런 고통이 오나?’하지만,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동물이나 사람이나 전부 자기 존재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통이 옵니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의 존재, 각종 각색의 존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도 그런 고통은 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천국이 어렵다. 고통의 세계다. 고난의
세계다. 역경의 세계이다.’할 정도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모든 일이 악인에게도 닥치고
의인에게도 닥친다.”했습니다. 솔로몬이 가만히 보니까 “악인도 닥치고 의인도 다 닥치더라.
모든 사람에게 다 닥치고 있더라. 헛되고 헛되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왕이니까
다 봤습니다.
이와 같이 존재하기 위해서 닥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밥을 갖다놔도 밥을 깨물어 먹고
소화시키려면 그만큼 수고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그렇게 즐거우면서도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즐거우면서도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서 그렇게 힘이 들어갑니다. 그것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도 그런 고통은 없지만, 존재하려니까 거기서 섬기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것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존재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은 다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너무 모르고 살다 보면 사람들이 쇼크를 받습니다. ‘왜 천국의 섭리사인데, 하나님이
지상천국을 이루신다는데, 지상천국의 세계에 환난이 가장 많이 있을까? 그러면서 역사가
이뤄져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죄가 있어서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인가?’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로 굳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죗값으로 인해서 받는 것도
있고, 그리고 앞날에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어려운 산을 넘어가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서는 ‘아, 이것을 받기 위해서 이런 어려움이 있었구나. 내가 이런 것에
있어서 잘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았구나. 받을 것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 받아놓고 후에
잘 되었구나.’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받을 고통은 받아버려야 됩니다. “이런 것들은
언제 받아도 받아야 된다. 그래서 조심하고 스스로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된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 환난을 받아도, 어려움을 받아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고통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고통이 옵니다. 또 고통이 오니까 거기서 하나님을 믿다가 마는 사람이 거의 90%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신앙을 하면서도 믿다가 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똑같이 고통이 오는구나. 똑같구나.’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친구들도 그런 고통이 있고, 똑같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다 가리다 보면 먹을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또 죄지을 까봐서 이것저것 가리다보면
늘 위축감 갖고 살게 되고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지,
그냥 이것저것 막 살다보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함으로 깨끗하게
되어서, 깨끗한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고, 인식하고 살아야 됩니다.
농사지을 때 ‘아, 너무 좋다.’고 가을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직접 겪어봐야 압니다. 겪어보면 ‘이래서 농사 안 짓고 돈을 주더라도 그냥 쌀을
팔아먹는 것이 더 좋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농사 안 짓고 쌀을 팔아먹으려니까
가서 직장 생활하고, 밤낮주야로 직장을 다녀야 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래도
덜 하거든요. 농사 짓는 것보다 그것이 더 힘듭니다. ‘다 힘들구나. 농사져서 힘들고, 직장생활
다니는데도 힘들고 다 힘들구나. 그러면 장사 해볼까?’하는데, 장사해도 힘든 것입니다.
‘언제 10원씩, 10원씩 이익 남겨서 살 수 있나? 아, 이것도 못하겠구나.’합니다.
이 세상살이가 다 힘든 것입니다. 다 힘듭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노력하고 그러면
조금 더 나아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다윗은 이런 역경과 고통을 받으면서 그냥 끝났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 7년
고통받고서 33년 동안에 그래도 잘 되었습니다. 그러니 투자를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7년 동안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늘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받으면서 울고 짜고 하면서
말씀을 여러 가지로 했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굉장히 많이 표현을 했습니다. 어느 왕보다
다윗이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의 표현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 울고 짜고 부르짖은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 23장에서 “하나님은 그래도 나의 목자가 되셨다.
그리고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양을 길러 봤습니다.
“결국은 그와 같이 해주셨다.” 양들은 목자가 살펴주면 최고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자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결국은 그래도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해오셨다. 그리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가 많았는데, 참 두렵고 떨리고 공포증에 살았는데, 나를 안위해 주시고
붙잡아주셨다.” 다윗은 일개나라 왕이 그 군인들을 다 풀어서 잡으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컸습니다. 차라리 그 공포가 덜하게 아주 죽는 것이 낫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아주 죽어버리면 덜합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늘 겪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그런 가운데 주의 지팡이로 나를 안위해 주시고, 보호해주셨다.
원수의 목전에서, 원수가 자기의 어떤 목적을 실행하려고 하면 그때에 나를 살려주셨다.
포기할 정도로, 아주 포기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건져주셨다.” 이것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다윗은 7년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그랬습니다. 작전이 2-3일에 한 번씩 있었는데,
그 작전이 모두 다윗 잡으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마음을 놓고 못 살은 것이 나와
있습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살았습니다. 신구약 성경 중에도 다윗이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일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3년을 느꼈고, 다윗은 7년 동안 느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렇게 많이 느꼈습니다.
선생은 월남 전쟁터에서 한 3년 정도 느꼈고, 섭리사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한 25년 동안
있었습니다. 죽음과 그런 고통을 한 25년 동안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늘 주님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라. 결국은 사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 말씀을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겪으니까요. 죽음의 공포가 오니까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있었나?” 여러분은 모릅니다. 내가 여러분이 모른다는 것을
압니다. 한 명도 모릅니다. 나만 압니다. 내가 맨날 웃으면서 하면 ‘아, 이제 편하게
되었는가보다.’ 그럽니다. 여기 월명동에 있을 때도 사람들이 우리가 나무 심는다고 감옥에다
갖다가 가두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해야 압니다. 여기 월명동을 개발할 때도
“저놈을 꼭 갖다가 감옥에다 가둔다. 꼭 갖다가 가두어 버린다. 가둬서 꼼짝 못하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몰랐지요? 그렇게 아주 계획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진산 사람들이
소스를 줬습니다. “정총재, 나무 캐다 심는다고 산림청에 얘기를 해서 꼭 갖다 가둬버린단다.
얼른 도망치던지 해야되겠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한 공포가 있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얘기를 안하고, 선생님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얘기를 안 하면 모릅니다. 그냥 즐겁기만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거기서는 청중과 어울리며 여러분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덜했습니다.
그리고 월남에 있을 때도 누구보다도 죽음의 고통을 제일 많이 겪었습니다. 그렇게 겪었나
안 겪었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은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더 해야된다. 더 일을 해야된다. 더 나가야 된다. 더 이렇게 해야된다.”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비양심적으로는 못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양심적으로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 믿는데 양심상 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다보면
그들에게 닥칠 죽음이 내게 닥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닥친 것입니다. 더 많이
닥치니까 책이 나옵니다. 차라리 아주 죽어버렸으면 괜찮은데,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제일
컸었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는 삶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이런 공포를 겪었을 때가 많았는데 내가 다윗이 쓴 것을 읽으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이런 공포를 느꼈구나.’ 우리는 여기서 상상도 못합니다. 그런 공포를 사실상 성경에
다 못씁니다. 다윗이 자기 겪은 것을 다 못썼습니다. 다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겪은 것을 다 못씁니다. 써도 글로 그것이 다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짧은 글로는 읽어서 그것이 다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간단하게 “여호와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죽음에서 건져 주십시오.”하면 어떤 죽음인지 잘 모릅니다. 그 상황을
다 쓰려면, 한 사건을 쓸 때 성경 한 30장씩 써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쓸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몇 줄 가지고 쓰니까 안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들이 모르고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알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알고 믿어라. 하나님을 알라. 인생사는 것을 알라.
오직 하나님이다. 월명동에 글을 써 놓은 대로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라. 형제들
마음을 알라. 가서 얘기하라. 대화를 해 보라. 마음이 아픈 형제들에게 가서 얘기를 해줘라.
대화를 해줘라. 그들도 마음이 아프고 있다. 가서 대화해라. 네가 마음이 아프듯이,
네가 고생하듯이 아프다. 그것이 십자가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밥만 먹으면 남을 위해 사셨다. 시돈땅, 사르밧 등 모든 각종 각색의
곳을 돌아다니시면서 그들을 위해 살았지 않느냐? 모두 그래서 그들을 구원을 시켰다. 배고픈
자, 아픈 자, 고통 당하는 자, 병든 자들을 구원을 시켰다.” 이들도 그리함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 마음을 알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라.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라. 그의 손발이 된다고 하지 않았냐? 그냥은 모르니까 자기를 편하면
안 된다. 그들을 구원시키고 그들과 같이 평안 하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기도했으니 함께 해주시옵소서. 온 세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공포가
있는 나라가 많은지 모릅니다. 전쟁의 공포가 있습니다. 왕을 해도 공포, 백성들도 공포입니다.
민족의 공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도 많고, 서로 전쟁하고 으르렁거리고, 모두 나쁜 단체들
만들어져서 고통이 주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 다 없애주시옵소서. 오! 하나님께서 없애주시기를
원합니다. 천천지 원한이니 없애주시고, 지구촌이 편안케 되게 해주시옵소서. 무력의 세계들을
다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사 해결해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2천년부터는 평화의 역사를 한다고 하니까 평화의 역사를 이들이 안 하면 안되게끔
하나님께서 해주시옵소서. 평화는 구원의 역사인데 안 하면 안되게끔 하나님께서 독점해서
흔들어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억울한 일 많이 당하고, 두려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은 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데, 악인들이 판을 치고 살고 있습니다. 지난 모든
이십세기까지 2천년 동안 오면서 얼마나 전쟁과 공포와 아픔과 떨림이었습니까? 19세기는
암흑의 세계였었는데 이제 평안한 세계, 성약역사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친히 우리가
기도합니다. 이들이 기도하게 해주시옵소서. “둘 이상이 내 이름을 위해 기도해도 들어주는데
왜 못하느냐? 모두 합심해서 기도하라. 중언부언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무엇을 기도할 지를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괴롭게 해주는 것이다. 괴로우니까 기도하게 하신다. 자기만
위해서 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하도록 하라. 그들과 같이 구원을 받으라. 너희는 구원을
받았으니 같이 구원을 시켜야 되지 않겠느냐? 왜 구원 받아놓고 가만히 있느냐? 그들의
고통과 아픔과 쓰라림을 알아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총을 주시고 의를 채워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보시옵소서. “모든 섭리를 나간 사람들도 고통스러워한다.
마음이 아파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간구해 줘라.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해주어라.
너희들이 살았을 때 못하면 언제 하겠느냐? 그것이 너희 의가 되리라. 너희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의와 사랑을 주시옵소서.
은총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영광과 의와 존귀로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옵소서. 삼위의 능력과 권능이 이들과 함께 하고 영원할지어다. 온 지구상의
각 교회들이 내 말을 듣고 깨닫고 형제들을 위로하고 붙잡아 주고 늘 고통을 같이 하고 기쁨도
같이 하게 해주시옵소서. 성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과 은혜가 함께 하고,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과, 주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들에게 함께 하고 영원할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