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련히 알아서 날씨 주관해 주시는 하나님

2015-08-24 23:12:13

8월 4일에 낮 기도를 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방의 온도가 30도가 훌쩍 넘었습니다.

이곳은 선풍기도 없으니 그야말로 찜통이었습니다.

‘너무 더운데 기도가 제대로 될까?’ 생각했는데,
<생각>을 집중하여 ‘영계’에 못 들어가면 안 되니까
<생각>을 단단히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너무 더워서 더 이상 기도를 못 하고,
하나님께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지났는데, 방 안이 서늘했습니다.

‘벌써 가을이 되었구나.
그렇게도 덥더니, 벌써 한 세월이 갔구나.’ 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더워서 어떻게 기도하지?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덥다고 했네.
금방 시원해지는 가을이 오는데 그것도 몰랐네.
벌써 ‘입추(立秋)인가?’ 하고 눈을 뜨고 달력을 봤습니다.

그런데 아직 ‘입추’가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니, 하나님이 오셔서 시원하게 해 준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만 시원한지, <전체>가 시원한지,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옆에 사람이 없어서 못 물어봤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시원하지? 살결이 시원하네.’ 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말고 눈을 떴으니,
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어봐야지.’ 하고,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때 ‘매일 오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받아서 사인을 하고 있는데,
그때 다시 방이 찜통이 되었습니다.

그때 더욱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대화할 때는
하나님이 오셔서 ‘서늘한 표적’이 일어났구나!

맞아! 아직 ‘입추’도 아닌데
하나님이 행차하심으로 인해 공기의 변화가 일어났구나!’

이제 왜 갑자기 방이 시원해졌는지 확실히 ‘확인’은 됐는데,
다시 시원하게는 안 됐습니다.

너무 더워서 하나님께 시원하게 해 달라고 해도 안 되고,
땀만 줄줄 흘렀습니다.

그래서 “시원하게 안 해 주려면 <말씀>을 받을 테니
<말씀>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 여호와와 성령과 성자가 그때마다 역사하며 도와줘도
사람들은 네가 방금 겪은 것같이 헷갈려하거나 모른다.

너무 더우니 시원하게 해 주며 역사해 줘도
‘입추인가? 때가 되어 시원한 것이지.
때가 되어 추운 것이지. 때가 되어 더운 것이지.
변화무쌍한 기후의 조화이지. 내 기분이지.’ 한다.

너같이 꼬치꼬치 따지고 확인하는 자는 <전능자의 행함>을 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위일체가 사랑하여 그때마다 작고 크게 역사해 주면,
‘우연인가? 기후의 변화인가? 내 착각인가?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지.’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삼위일체는 <만물>로도 계시한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서도 계시하며 돕는다.

그때마다 ‘합당한 만물’을 들어 계시해 주고,
‘구름으로 각종 형상’을 만들어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물 계시>를 받고도
‘만물을 많이 보다 보니,
내가 상상한 것이 보이네?’ 하기도 하고,
삼위가 <사람>을 통해 역사하여 도와도
‘가다 보니, 뇌에 스친 사람도 만나게 됐네.
우연의 일치다.’ 하기도 한다.

<만물>이나 <사람>을 보여 주며 깨닫게 해 주기까지 하니
나 여호와와 성령과 성자가 주는 계시인 것이다.

항상 ‘전능자’를 인식하고 생각해라.

늘 <생각>에서 잊지 않고 생각해야
내가 ‘만물’이나 ‘사람’을 통해 도와도 알고,
불러도 알고, 계시해 줘도 알게 된다.

나는 너희를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나니, 그것으로 인해
나 여호와가 역사하지 않아도 표적이 일어나는 때도 있다.

또한 ‘사역자’를 통해서 행하여 표적을 일으키고,
수시로 축복을 받게 해 주어 표적이 일어나게 해 주기도 한다.

또한 본인이 노력하니, <공의의 법>에 따라서
본인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게 하기도 한다.”

하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서론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가 우리를 사랑해서 해 주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우연이네. 날씨 조화네. 기후 변화네.
바람이 불 때 되니 불었네. 해가 비칠 때 되니 비쳤네.” 합니다.

그러니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도 성령님도 성자도
심정이 답답하고, 어이가 없고,
‘왜 내 사랑하는 자가 깨닫지 못하나.’ 하며
어느 때는 화도 난다고 했습니다.

해 줘도 모르면 ‘지극히 육적’입니다.

<깨닫는 것>에 아둔하면, 삼위일체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해 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 줘도 모르니까 뜨겁든지, 춥든지, 비가 오든지,
눈이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그냥 놔두십니다.

지나가다가 가랑잎만 몸에 스쳐 가도
‘혹시 하나님, 성령님, 성자께서 나를 부르셨어요?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해야 됩니다.

그랬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면
그때는! ‘내 얼굴이 크니까
가랑잎이 내 얼굴을 스쳤구나.’ 하면 됩니다.


2015년 8월 23일 주일 말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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